벨라만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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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라만 해전은 1943년 8월 6일 밤, 솔로몬 제도 벨라만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미국 해군이 일본 해군을 상대로 야간 전투에서 거둔 첫 승리이다. 일본군은 4척의 구축함을 투입하여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려 했으나, 미 해군의 기습적인 어뢰 공격으로 구축함 3척이 침몰하고 1척이 피해를 입어 수송에 실패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1,210명의 사상자를 내고 콜롬방가라 섬에 대한 보급로를 잃었으며, 미군은 야간 전투에서의 자신감을 얻고, 알레이 버크 제독의 전술과 SG 레이더의 성능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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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만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명 | 벨라만 해전 |
다른 이름 | 베라 만 야전 (베라 만 야전) |
관련 전쟁 | 태평양 전쟁 / 대동아 전쟁 |
전역 | 솔로몬 제도 전역 |
날짜 | 1943년 8월 6일 ~ 7일 |
장소 | 솔로몬 제도 콜롬방가라섬 서방 해역 |
결과 | 미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및 지도자 | |
미국 | 프레데릭 무스브러거 |
일본 제국 해군 | 스기우라 카주 |
전력 | |
미국 | 구축함 6척 |
일본 제국 | 구축함 4척 |
피해 규모 | |
미국 | 어뢰정 1척 침몰, 전사자 수 불명 |
일본 제국 | 구축함 3척 침몰, 전사 1,210명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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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43년 7월 13일 콜롬방가라 해전에서 승리한 후, 일본 제국 해군은 뉴조지아 제도의 콜롬방가라섬 빌라 항구를 중심으로 병력과 물자를 지속적으로 증강했다. 이는 미군의 카트휠 작전에 따른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1]. 일본군은 '도쿄 익스프레스'라 불리는 야간 구축함 고속 수송 작전을 통해 7월 말과 8월 초에 걸쳐 여러 차례 보급에 성공했다[2].
그러나 8월 5일, 미군이 뉴 조지아 섬의 문다 비행장을 점령하자[4], 일본군은 콜롬방가라 섬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추가 병력 증원을 결정했다[4][26].
한편, 미군은 이전 해전에서 입은 순양함 피해로 인해[89] 즉시 투입 가능한 전력이 부족했다. 이에 세어도어 S. 윌킨슨 소장은 프레데릭 무스브루거 중령이 이끄는 제12구축전대와 로저 심슨 중령의 제15구축전대로 구성된 제31.2 임무전대(Task Group 31.2, TG 31.2)에게 일본 수송선단 요격 임무를 맡겼다[89][7].
8월 6일 밤, 일본은 스기우라 가주 대령 지휘 아래 가게로급 구축함 하기카제, 아라시와 시라츠유급 구축함 고후, 시구레 등 구축함 4척으로 약 950명의 병력과 보급품 수송 작전을 개시했다[5]. 미군은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무스브루거 중령 휘하의 구축함 6척(던랩, 크레이븐, 모리, 랭, 스테렛, 스택)으로 벨라 만에서 매복 작전을 준비했다[7].
2. 1. 일본군의 솔로몬 제도 수송 작전
1943년 7월 13일 콜롬방가라 해전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 해군은 뉴조지아 제도에 병력을 지속적으로 증강시켰다. 이는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군이 카트휠 작전의 일환으로 과달카날을 점령한 후 추가적인 섬 건너뛰기를 막으려는 목적이었다. 일본군은 콜롬방가라섬 남쪽 끝 빌라 항구 주변에 12,400명의 수비대를 배치했다.[1] 빌라는 콜롬방가라의 주요 항구였으며, 미군이 '도쿄 익스프레스'라고 부르던 야간 구축함 고속 수송을 통해 보급되었다. 7월 19일, 7월 29일, 8월 1일에 세 차례의 보급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2]8월 1일의 마지막 작전에서는 15척의 미국 PT 보트 부대가 공격을 시도했으나, 26~30발의 어뢰를 발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일본 구축함 4척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 중위가 지휘하던 어뢰정 ''PT-109''가 일본 구축함 아마기리에 의해 충돌되어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3] 아마기리 함장 하나미 고헤이 소좌는 의도적인 충돌을 명령했다고 회상하지만, 당시 제11구축대 사령관이었던 야마시로 가쓰모리는 하나미 함장에게 회피를 명령했으나 실수로 충돌한 것이라고 다르게 기억했다. 충돌로 PT-109 승무원 2명이 전사했으나, 케네디 중위를 포함한 나머지 11명은 인근 섬으로 표류한 뒤 일주일 후 코스트 워쳐스에 의해 구조되었고, 제3함대 사령관 윌리엄 홀시 대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54] 아마기리는 함수와 스크류 일부가 손상되는 피해를 입었다.[52][53]
한편, 7월 초 클라 만 야전(7월 5일)과 콜롬방가라 섬 해전(7월 12일)에서 양측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 해군은 구축함 니이즈키와 경순양함 진츠를 잃었고, 미 해군은 경순양함 헬레나를 잃었으며 다른 순양함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미군 제36.1 임무군(월튼 아인즈워스 소장 지휘)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일본 해군은 이 기회를 이용해 중순양함 3척(구마노, 스즈야, 쵸카이)과 수뢰전대를 투입하려 했으나, 오히려 야간 폭격으로 중순양함 구마노가 대파되고 구축함 유구레와 키요나미가 침몰하는 손실을 겪었다.[32][33] 계속되는 주야간 항공 공격을 피하기 위해, 일본 해군은 콜롬방가라 섬으로의 수송 루트를 벨라 만과 브라켓 수도를 경유하는 경로로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34]
변경된 루트를 이용한 첫 수송 작전은 7월 23일에 재개되었다. 구축함 3척(유키카제, 하마카제, 미카즈키)이 제38사단 소속 육군 병사 782명과 물자 56톤을 싣고 라바울을 출발했다.[38][39] 미군 어뢰정의 공격 시도와 야간 조명탄 투하에도 불구하고 수송 임무를 완료하고 귀환했다.[40][41] 이 루트는 벨라라벨라 섬과 그 남쪽 라논가 섬 사이의 윌슨 해협 및 기조 해협을 통과하여 브라켓 수도에 면한 콜롬방가라 섬 서남부 아리엘에 도달하는 경로였다.[42][39][43] 7월 25일부터 27일까지는 구축함 3척(하기카제, 아라시, 시구레)이 산타 이사벨 섬 레카타의 육군 부대를 부인으로 이동시키는 작전을 피해 없이 완료했다.[35][44]
8월 1일, PT-109 충돌 사건이 발생했던 수송 작전은 제4구축대 사령관 스기우라 가주 대좌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수송대는 하기카제, 아라시, 시구레로 구성되었고, 경계대는 제11구축대 사령관 야마시로 가쓰모리가 지휘하는 아마기리 1척이었다. 육전대원 763명과 물자 54톤을 싣고 라바울을 출발, 부인에서 육해군 병력 902명과 물자 73톤을 추가로 싣고 콜롬방가라 섬으로 향했다.[48][49][47][50][46] 벨라 만을 통과하며 어뢰정 공격과 야간 폭격을 피하고 양륙을 완료했으며, 귀환 중에 아마기리가 PT-109와 충돌했다.
미군은 렌도바 섬을 점령한 후 그곳에 어뢰정 기지를 설치하고 4개 어뢰정대 총 52척을 배치하여[37] 콜롬방가라 주변에서 일본군의 도쿄 익스프레스를 저지하려 했으나, 이 어뢰정대는 구축함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다.[34][56] 8월 5일(일부 자료는 8월 3일[26]) 미군이 뉴 조지아 섬의 문다 비행장을 점령하자[4], 일본군은 인접한 콜롬방가라 섬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추가 병력 증원을 결정했다.[4][26]
미군 측에서는 콜롬방가라 해전에서 순양함들이 피해를 입어 즉시 투입 가능한 순양함이 부족했다. 이에 제3수륙양용부대 사령관 세어도어 S. 윌킨슨 소장은 새로운 차단 수단으로 구축함 부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34] 윌킨슨 소장은 프레데릭 무스브루거 중령이 이끄는 제12구축전대와 로저 심슨 중령의 제15구축전대로 구성된 제31.2 임무전대(TG 31.2)에게 일본 수송 저지 임무를 맡겼다.[89] 이 부대는 아레이 버크 대령이 고대 포에니 전쟁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전술에서 영감을 받아 고안한 새로운 구축함 전술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버크 대령은 이 전술에 대해 "두 개의 구축대가 병행하는 대형으로 항진하여, 하나의 구축대가 밤을 틈타 적에게 접근, 어뢰 발사 후에 퇴각한다. 어뢰가 명중하고 적이 퇴각하는 앞선 구축대에 포격을 시작하면, 두 번째 구축대는 돌연 다른 방면에서 공격으로 전환한다. 혼란한 적이 이 새로운 예상치 못한 공격에 눈을 돌릴 때, 첫 번째 구축대는 다시 공격으로 전환한다."라고 설명하며, 섬이 많은 솔로몬 제도가 이러한 기습 전술에 이상적이라고 보았다.[34] 버크 대령은 전술 실행 전에 다른 부대로 전출되었고, 그의 후임인 무스브루거 중좌가 이 전술을 이어받아 벨라만 해전에 임하게 되었다.[57]
문다 비행장 함락 이후, 제8방면군은 콜롬방가라 섬의 방어 강화를 위해 제6사단 병력 약 1,200명의 증원을 결정했다.[26][59] 8월 6일 밤 실행될 이 수송 작전은 제4구축대 사령관 스기우라 가주 대좌가 지휘하기로 했다. 부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었다.
스기우라 사령관은 벨라 만을 직접 통과하는 것은 위험이 크다며, 벨라라벨라 섬으로 수송한 뒤 대발동정 등으로 옮기는 방안을 제안했다. 또한, 제3수뢰전대 사령관 이주인 마츠지 대좌가 직접 지휘하는 경순양함 센다이가 부인으로 향하는 별도의 수송 작전에 동행하는 것이 적의 경계심만 높일 것이라고 반대했으나, 상급 부대의 결정으로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3] 작전 실행 시, 제3수뢰전대 선임 참모 니탄다 사부로 중좌가 하기카제에 동승했다.
2. 2. 미군의 새로운 전술
콜롬방가라 섬 방면에서 활동하던 미군 어뢰정대는 대발동정 1척을 격침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구축함을 이용한 야간 수송 작전, 이른바 '도쿄 급행'을 저지하는 데는 큰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34]。 어뢰정들은 서로 연계하여 공격하지 못하는 등[56] 전술적인 문제점을 드러냈으며, 구축함 수송을 효과적으로 방해하지 못했다[34]。이에 제3수륙양용부대 사령관 세어도어 S. 윌킨슨(Theodore S. Wilkinson) 소장은 어뢰정 대신 구축함 부대를 투입하여 일본군의 해상 수송로를 차단하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했다[34]。 당시 투입 가능한 전력은 제31.2 임무군의 구축함 6척뿐이었다[34]。
제31.2 임무군 사령관이었던 아레이 버크(Arleigh Burke) 대령은 이전부터 구축함만으로 효과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전술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고대 포에니 전쟁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사용했던 전술에서 영감을 얻었다[34]。 버크 대령은 이 전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특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전법은 그 실행이 합리적이고, 간단하며, 게다가 해군의 사용에 적합한 것으로서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 계획은 잇달아 기습으로 적에게 공격을 가한다는 데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두 개의 구축대가 병행하는 대형으로 항진하도록 배치함으로써 달성된다. 하나의 구축대는 밤을 틈타 적에게 접근, 어뢰 발사 후에 퇴각한다. 어뢰가 명중하고, 적이 퇴각하는 앞선 구축대에 포격을 시작하면, 두 번째 구축대는 돌연 다른 방면에서 공격으로 전환한다. 혼란한 적이 이 새로운 예상치 못한 공격에 눈을 돌릴 때, 첫 번째 구축대는 다시 공격으로 전환한다. 물론 솔로몬 제도 방면은 많은 섬들이 두 번째 구축대에 대한 적 레이더 탐지를 방해하는 데 도움이 되므로, 이 종류의 전법은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버크 대령은 이 새로운 전술을 실전에 적용하기 직전 상급 지휘관으로 전출되었고[57], 그의 후임으로 프레데릭 무스브루거(Frederic Moosbrugger)[58] 중좌가 임명되었다. 무스브루거 중좌는 버크 대령이 고안한 전술을 충실히 계승하여 벨라만 해전에 임하게 되었다[57]。
3. 세력
벨라만 해전에는 일본 제국 해군과 미국 해군의 구축함 전력이 투입되었다. 일본 제국 해군은 스기우라 가주 대좌가 이끄는 구축함 4척을 동원했으며,[5] 미국 해군은 프레더릭 무스브루거 사령관의 지휘 아래 구축함 6척으로 대응했다.[7]
3. 1. 일본 해군
1943년 8월 초, 뉴 조지아 섬 전투가 진행 중이던 솔로몬 제도에서 미군은 8월 3일 문다 비행장을 점령했다. 이로 인해 인접한 콜롬방가라 섬의 일본군 비행장도 위협받게 되었고, 섬에 주둔 중이던 일본 육군 병력(약 2,400명)의 상황도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콜롬방가라 섬의 일본군 제1선 병력은 육군 1,400명, 해군 600명으로 감소했으며 중화기도 부족한 상태였다. 이에 일본 육군 제8방면군은 콜롬방가라 섬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제6사단 소속 병력 약 1,200명의 증원을 결정했다.[26][59]
일본 제국 해군은 이 증원 병력과 보급품을 콜롬방가라 섬으로 수송하기 위해 쥐 수송 작전을 계획했다. 8월 6일 밤, 제4구축대 사령관 스기우라 가주 대좌가 이끄는 구축함 4척이 투입되었다.[5] 스기우라 대좌는 기함인 하기카제에 탑승했으며, 제3수뢰전대 사령부의 선임 참모 니탄다 사부로 중좌도 동승했다. 함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63]
구분 | 지휘관 | 소속 부대 | 함선 | 비고 |
---|---|---|---|---|
수송대 | 스기우라 가주 대좌 (제4구축대 사령) | 제4구축대 | 하기카제 (기함) | 육군 병력 약 950명 및 물자 90ton 수송[5] |
제4구축대 | 아라시 | 상동 | ||
제24구축대 | 가와카제 | 상동 | ||
경계대 | 하라 타메이치 대령 (제27구축대 사령) | 제27구축대 | 시구레 | 호위 임무, 물자/병력 미탑재[90] |
수송대는 제6사단 소속 6개 중대(지휘관 미카미 키사부로 대위) 병력 약 950명과[5] 90ton의 물자를 싣고 있었다.[26][59]
작전 계획은 이전 세 차례의 성공적인 수송 작전과 동일하게 벨라 만을 통과하는 항로를 이용하는 것이었다.[6] 그러나 경계대 지휘관인 하라 타메이치 대령은 이전과 같은 경로를 반복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6] 또한 수송대 지휘관인 스기우라 가주 대좌 역시 콜롬방가라 섬 대신 벨라라벨라 섬으로 병력을 수송한 뒤 대발동정 등으로 옮기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상급 부대인 남동 방면 함대와 제8함대의 강한 의향에 따라 기존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스기우라 대좌는 동시에 부건빌 섬으로 향하는 별도의 수송 작전(경순양함 센다이 주도)이 적의 경계를 불필요하게 높일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3. 2. 미국 해군
미국 해군은 총 6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제31.2 기동부대(Task Group 31.2, TG 31.2)를 투입했다. 이 부대는 프레더릭 무스브루거 사령관이 지휘했으며, 일본군의 수송 작전을 사전에 파악하고 이를 요격하기 위해 출동했다.[7] 미 해군 승무원들은 이전까지 순양함에 의존해야 했던 교전 교리에서 벗어나 구축함 자체적인 전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되면서 사기가 높았다.[8] 또한 쿨라 만 전투[10] 등 이전 전투의 교훈과 마크 15 어뢰의 기술적 문제 해결을 통해 야간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2]
부대 | 기함 | 소속 함선 | 지휘관 |
---|---|---|---|
제12구축대 | 던랩 | 던랩, 크레이븐, 모리 | 프레더릭 무스브루거 사령관 (TG 31.2 전체 지휘) |
제15구축대 | 스테렛 | 랭, 스테렛, 스택 | 로저 심슨 중령 |
미국 함선들은 8월 6일 23시 33분에 일본 함대와 레이더 접촉에 성공했다. 무스브루거의 작전 계획은 부대를 두 개로 나누는 것이었다. 무스브루거가 직접 지휘하는 제12구축대(던랩, 크레이븐, 모리)는 어뢰를 그대로 유지하고 콜롬방가라 섬의 지형을 이용해 은밀하게 접근하여 기습적인 어뢰 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한편, 로저 심슨 중령이 지휘하는 제15구축대(랭, 스테렛, 스택)는 일부 어뢰 발사관을 제거하고 40mm 포를 추가로 장착했으며,[2] 제12구축대의 공격을 엄호하면서 일본 함대의 예상 침로를 가로막는 역할을 맡았다. 이는 일본 함대가 첫 어뢰 공격을 피하려고 기동할 경우, 제15구축대의 공격에 측면을 노출시키도록 유도하는 계획이었다.[9] 두 부대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바꾸거나 추가 어뢰 공격을 할 수도 있었다.[2]
미군은 일본군이 당시 최신 센티미터파 SG 레이더에 필적할 만한 성능의 레이더를 보유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작전을 수행했다. 구형 미터파 레이더로는 함선과 섬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해, 제12구축대는 어뢰 발사 후 콜롬방가라 섬 쪽으로 빠르게 기동하여 일본군의 탐지를 피하고자 했다. 실제로 당시 일본 구축함에는 레이더가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12]
제12구축대의 던랩, 크레이븐, 모리는 63초 동안 총 24발의 어뢰를 발사한 후[11] 신속하게 후퇴했다. 미군은 어뢰가 명중하기 전까지 함포 사격을 하지 않아 기습 효과를 극대화했다.[2] 제15구축대의 랭, 스테렛, 스택은 일본 함대의 T자 대형을 가로지르는 위치를 점하고, 어뢰가 폭발하기 시작하자 즉시 포격을 개시했다.
결과적으로 일본 구축함 4척 모두 미군 어뢰에 명중했다. 하기카제, 아라시, 카와카제는 화염에 휩싸여 즉시 침몰하거나 미군의 함포 사격에 의해 격침되었다. 시구레에 명중한 어뢰는 불발이었고, 선체 일부만 손상된 채 어둠 속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시구레는 후퇴하며 8발의 어뢰를 발사했지만 모두 빗나갔다.[13]
4. 전개
1943년 8월 6일 밤, 일본 제국 해군은 콜롬방가라 섬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스기우라 가주 대좌 지휘 하의 구축함 4척(하기카제, 아라시, 고후, 시구레)을 벨라 만으로 보냈다.[5] 이는 도쿄 익스프레스라 불리는 야간 수송 작전이었다. 한편, 미국 해군은 프레더릭 무스브루거 중좌가 이끄는 구축함 6척(제31.2 기동부대)으로 요격에 나섰다.[7]
미군 함대는 레이더를 이용해 8월 6일 23시 33분경 일본 함대를 먼저 탐지했다.[70] 무스브루거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제12구축대가 먼저 기습적으로 어뢰 공격을 감행하고 제15구축대가 뒤이어 포격하는 전술을 계획했다.[9] 23시 41분, 미 제12구축대는 총 24발의 어뢰를 발사한 후[11] 즉시 이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의 어뢰가 일본 함대에 명중하기 시작하여 하기카제, 아라시, 고후 3척이 큰 피해를 입었다. 유일하게 후미에 있던 시구레는 어뢰를 맞았으나 불발하여[25] 큰 피해 없이 전장을 이탈했다.[13] 이어 미 제15구축대가 항해 불능 상태에 빠진 일본 구축함들을 향해 포격을 개시했고, 이탈했던 제12구축대도 합류하여 포격했다.
결과적으로 일본 구축함 하기카제, 아라시, 고후 3척은 모두 격침되었고, 시구레만이 생환했다.[27] 미군은 단 한 척의 손실도 없이 완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는 레이더를 활용한 미군의 효과적인 야간 기습 전술의 성공 사례로 평가되며, 일본 해군에게는 야간 수뢰 전투에서의 참패라는 큰 충격을 안겼다.[28] 또한, 일본군의 수송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여 수송 중이던 육군 병력 940명 중 820명이 전사하는 큰 인명 손실을 낳았다.[60]
4. 1. 서막
1943년 8월 초, 뉴 조지아 섬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일본 제국 해군은 솔로몬 제도의 콜롬방가라 섬에 고립된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야간 수송 작전, 이른바 도쿄 익스프레스를 계속하고 있었다. 8월 6일 밤, 일본군은 스기우라 가주 대좌가 이끄는 구축함 4척을 파견하여 콜롬방가라 섬으로 병력과 보급품을 수송하려 했다. 이 부대는 스기우라 대좌의 제4구축대 소속 가게로급 구축함 2척(하기카제, 아라시)과 제27구축대 사령관 하라 타메이치 대령 소속의 시라츠유급 구축함 2척(고후, 시구레)으로 구성되었으며, 약 950명의 병력과 90ton의 물자를 싣고 있었다.[5]이들이 증원하려던 빌라의 일본 비행장은 이미 함락 직전이었고, 실제로 그날 늦게 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문다 곶 전투). 일본 지휘부는 빌라를 다음 방어선의 중심으로 삼으려 했으나, 작전 계획은 이전 세 번의 성공적인 수송 작전과 동일하게 벨라 만을 통과하는 경로를 고수했다. 하라 타메이치 대령은 이전 작전을 반복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주장하며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 한편, 8월 6일 아침, 미군 정찰기는 이미 일본 함대의 이동을 포착했지만, 스기우라 대좌는 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미국 해군은 일본군의 이러한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프레더릭 무스브루거 중좌가 지휘하는 6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제31.2 기동부대(TG 31.2)가 일본 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8월 6일 오전 11시 30분 퍼비스 베이에서 출항했다.[7] 이 부대는 던랩, 크레이븐, 모리, 랭, 스테렛, 스택으로 이루어졌다. 미군 승조원들은 이전까지 순양함의 지시에 따라야 했던 교리에서 벗어나 구축함만의 독자적인 전술을 구사할 기회를 얻게 되어 사기가 높았다.[8]
미군 함대는 8월 6일 밤 10시 28분 블랙켓 해협에 진입하여 수색했으나 일본 함대를 발견하지 못했고, 11시 23분경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벨라 만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일본 함대 역시 벨라 만 북쪽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무스브루거는 자신의 부대를 두 개 제대로 나누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 제12구축대(던랩, 크레이븐, 모리)는 콜롬방가라 섬의 그림자를 이용해 은밀히 접근하여 기습적으로 어뢰 공격을 감행하고, 로저 심슨 소령이 지휘하는 제15구축대(랭, 스테렛, 스택)는 일본 함대의 예상 침로를 가로막으며 엄호하는 역할이었다. 제15구축대는 일부 어뢰 발사관을 제거하고 40mm 대공포를 추가로 장착한 상태였다.[2] 이 계획은 일본 함대가 첫 번째 어뢰 공격을 피하기 위해 기동하면, 두 번째 제대로부터 측면 어뢰 공격에 노출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9]
미군은 쿨라 만 전투 등 이전의 야간 해전 경험과 어뢰정과의 교전, 그리고 마크 15 어뢰의 기술적 결함 해결을 통해 새로운 전술을 준비했다. 특히, 신형 센티미터파 SG 레이더의 우위를 활용하여 어뢰가 명중하기 전까지는 함포 사격을 자제함으로써 기습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다.[2]
4. 2. 전투
미 해군의 구축함 6척으로 구성된 제31.2 기동부대(TG 31.2)는 프레더릭 무스브루거 중령의 지휘 아래 일본 수송 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출동했다. 이 부대는 일본군의 작전을 사전에 통보받았다.[7] 미군 함대는 던랩(DD-384), 크레이븐(DD-382), 모리(DD-401), 랭(DD-399), 스테레트(DD-407), 스택(DD-406)으로 구성되었다. 무스브루거는 자신의 부대를 두 개의 소부대로 나누었다. 제12구축대(던랩, 크레이븐, 모리)는 어뢰 공격을 주 임무로 삼아 콜롬방가라 섬의 지형을 이용해 은밀히 접근했고, 로저 심슨(Roger Simpson) 소령이 지휘하는 제15구축대(랭, 스테레트, 스택)는 일부 어뢰 발사관 대신 40mm 포를 추가로 장착하고[2], 일본 함대의 예상 침로를 가로막으며 포격 지원 및 엄호 역할을 맡았다.[9] 이는 일본 함대가 제12구축대의 어뢰 공격을 피하려고 기동하면 제15구축대의 공격에 노출되도록 유도하는 계획이었다.[9] 미군 승무원들은 쿨라 만 전투[10] 등 이전 전투의 교훈과 마크 15 어뢰의 기술적 문제 해결을 바탕으로, 어뢰가 명중하기 전까지 함포 사격을 금지하여 기습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다.[2]thumb
한편, 스기우라 가주 대좌가 이끄는 일본 수송 함대(구축함 하기카제, 아라시, 고후, 시구레)는 하기카제를 선두로 단종진을 이루어 30노트의 속도로 벨라 만으로 진입하고 있었다.[67] 진형의 가장 후미에 있던 시구레의 하라 타메이치 대좌는 적함의 출현을 예상하고 앞 함선과의 거리를 1000m로 벌렸다. 당시 일본 함선에는 레이더가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12]
8월 6일 23시 33분, 제12구축대의 기함 던랩이 SG 레이더로 약 19nmi 거리에서 일본 함대를 처음 탐지했다.[70] 다른 미군 구축함들도 곧이어 일본 함대를 포착했다. 무스브루거는 제15구축대에 좌현으로 변침하여 T자 형세를 형성하도록 명령했고, 제12구축대에는 어뢰 발사를 준비시켰다. 23시 41분, 양측 함대의 거리가 약 6000m까지 좁혀지자 무스브루거는 제12구축대에 어뢰 발사 명령을 내렸다.
던랩, 크레이븐, 모리는 63초 동안 총 24발의 어뢰를 발사한 후[11] 즉시 우현으로 급선회하여 콜롬방가라 섬의 그림자 속으로 은폐하며 후퇴했다. 어뢰가 일본 함대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23시 43분경 일본 함대의 견시들이 미군 함대를 발견하고 보고했다. 스기우라 대좌는 그제야 미군이 어뢰정이 아닌 구축함임을 인지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23시 44분, 미군의 어뢰가 일본 함대에 명중하기 시작했다. 아라시는 기관실에 3발의 어뢰를 맞고 폭발했으며, 고후는 탄약고에 3발이 명중하여 선수가 파괴되었다. 하기카제 역시 기관실에 5발의 어뢰를 맞고 항해 불능 상태에 빠졌다. 유일하게 대열 후미에 있던 시구레는 어뢰 한 발이 타(舵)에 명중했으나 폭발하지 않고 선체를 관통하여 큰 피해를 면했다.[25] 23시 45분, 시구레는 반격으로 8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모두 빗나갔다.[13] 그럼에도 시구레에 탑승하고 있던 하라 대좌는 최소 1척 이상의 미군 구축함을 격침시켰다고 오판하고 후퇴를 결정했다.[89]
23시 47분부터는 T자 대형을 형성한 제15구축대(랭, 스테레트, 스택)가 항해 불능 상태에 빠진 일본 구축함들을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특히 스택은 추가로 어뢰를 발사하여 23시 52분에 고후를 격침시켰다. 고후는 이날 전투에서 가장 먼저 침몰한 함선이 되었다. 23시 55분에는 어뢰 공격 후 이탈했던 제12구축대도 전장으로 복귀하여 포격에 가담했다.
8월 7일 0시 10분, 집중 포화를 견디지 못한 아라시의 탄약고가 대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했다. 무스브루거는 전과에 만족하고 제15구축대에 철수를 명령했으며, 제12구축대는 마지막까지 떠 있던 하기카제에 대한 포격을 계속했다. 하기카제는 0시 18분에 결국 침몰했다. 미군 함대는 이후 약 45분간 일본군 생존자 구조를 시도했다. 도주한 시구레는 8월 7일 라바울로 귀환했다.[72]
미군은 이 전투에서 총 34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최소 6발 이상을 명중시킨 것으로 추정되며, 단 한 척의 손실도 없이 일본 구축함 3척(하기카제, 아라시, 고후)을 격침하는 완승을 거두었다. 일본 측은 이 전투에서 3척의 구축함과 함께 제4구축대 사령관 스기우라 가주 대좌를 제외한 아라시 구축함장 스기오카 고키치 중좌, 고후 구축함장 야나세 요시오 소좌 등 승무원 약 527명과 수송 중이던 육군 병력 940명 중 820명이 전사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60] 시구레는 미군 구축함 1척 대파를 보고했으나[75], 실제 미군 측 피해는 전무했다.[69] 이 전투는 레이더를 활용한 미군의 야간 기습 전술이 완벽하게 성공한 사례로 기록되었으며, 일본 제국 해군에게는 야간 수뢰 전투에서의 참패라는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28]
5. 결과
벨라만 해전의 결과,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하기카제, 아라시, 고후 3척의 구축함이 격침되었고, 시구레만이 유일하게 생환했다[27]. 한 기록에 따르면 총 1,210명의 일본 장병이 전사했는데, 이 중 900명은 육군 병력이었다[89].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익사자를 포함하여 총 685명의 군인이 사망했으며[14], 함선별로는 ''하기카제''와 ''아라시''에서 각각 178명, ''고후''에서 169명의 해군 장병이 사망했다[15][16][17]. 제4구축대 사령관 스기우라 가주 대좌를 포함한 310명(다른 기록에는 300명[18])만이 살아남았다[89]. 전투 후 침몰한 함선에서 표류하던 많은 일본군과 해군 장병들은 미군의 구조 제안을 거부했다[14]. 생존자 중 약 300명은 벨라 라벨라에 도착했고, 이후 콜롬방가라로 이송되었다[18].
반면, 미군은 이 전투에서 단 한 척의 함선도 피격되지 않았으며, 유일한 사상자는 사고로 인한 포탄 장전병의 압착 부상 1명뿐이었다[19]. 이는 콜롬방가라 해전 이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벌어진 전투로, 일본 해군이 야간 구축함 작전에서 처음으로 완패한 사례였다[7][28]. 미군 구축함 6척은 이전에 15척의 PT 보트가 실패했던 임무, 즉 미군이나 연합군 측의 피해 없이 어뢰 공격만으로 일본군의 도쿄 급행 수송 작전을 저지하고 구축함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했다[7]. 미군은 이 전투를 통해 야전에서도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으며, SG 레이더의 성능과 알레이 버크 제독이 고안한 전술의 유효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89].
이 패배는 일본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28], 결과적으로 콜롬방가라 주둔 병력 증강 시도가 좌절되고 이후 콜롬방가라에서 철수하는 결정의 한 원인이 되었다[89]. 일본군은 더 이상 콜롬방가라의 주둔군에게 물자를 보급할 수 없게 되었다[20]. 연합군은 이를 기회로 콜롬방가라를 우회하여 1943년 8월 15일 서쪽의 벨라 라벨라에 상륙했다[20]. 결국 일본군은 콜롬방가라를 포기하고 10월 초까지 철수를 완료했다[20].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미 해군 구축함 함장 클리프턴 이버슨 중령(''던랩'' 함장)과 프랭크 가드너 굴드 중령(''스테렛'' 함장)은 해군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21][22]. 또한 현대 미 해군의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 CG-72 벨라 걸프는 이 해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6. 해전의 의의
벨라만 해전에서 일본군은 1,210명의 장병을 잃었으며, 이 중 900명은 육군 소속이었다.[89] 생존자는 스기우라 시게토시 소장을 포함해 310명에 불과했다. 이 큰 피해는 일본군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으며, 결국 콜롬방가라섬에서의 철수를 결정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미군에게 이 전투는 야간 전투에서도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미군의 SG 레이더와 알레이 버크 제독이 고안한 새로운 전술이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었던 체스터 니미츠 원수는 훗날 벨라만 해전을 "전술적 집중이라는 것은 부대가 분리되어 행동하더라도 상호 지원하는 경우에는 이를 달성할 수 있음을 보여준 적절한 사례이다. 마침내 미국은 일본이 자랑하는 야간 전투에서 그들을 능가하는 전법을 개발했다."라고 평가하며 그 의의를 강조했다. 정확히 1년 전의 제1차 솔로몬 해전 이후, 1943년 3월 5일~6일의 빌라 스탄모어 야간 해전을 제외하면 일본 함대에 큰 피해를 주면서도 미 함대 역시 적지 않은 손실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클라만 해전이나 콜롬방가라 해전에서 에런 스패로우 에인스워스 소장의 분전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지만, 여전히 일본 해군의 야간 전투 능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있었다.[84] 벨라만 해전의 승리는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니미츠 원수는 벨라만 해전의 승자인 프레더릭 무스브루거 중좌, 전술을 입안한 알레이 버크 대령, 그리고 빌라 스탄모어 야간 해전과 부겐빌 섬 해전의 승리자인 아론 메릴 소장을 "이번 전쟁의 해전을 가장 훌륭하게 수행한 사람들"로 높이 평가했다.[85] 윌리엄 홀시 대장 역시 벨라만 해전의 승리를 크게 기뻐하며 전투의 상세 내용을 직접 기록으로 남기려 했을 정도였다.[86]
알레이 버크 대령은 이후 솔로몬 제도 전투의 마지막 해전인 1943년 11월 24일~25일의 세인트 조지 곶 해전에서 자신이 고안한 전술을 직접 구사하여 다시 한번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해전의 중요성을 기리기 위해, 호위 항공모함 벨라 걸프(CVE-111)가 1945년부터 1946년까지, 그리고 타이콘데로가급 유도 미사일 순양함 벨라 걸프(CG-72)가 1993년부터 2022년까지 취역하여 해전의 이름을 계승했다.[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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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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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806二水戦日誌(2)]]p.6「(四)第二十七驅逐隊 時雨 引續キNTBニ在リ同方面作戰中ニシテ六日4dg(萩風、嵐)江風ト共ニ「コロンバンガラ」輸送任務ニテ敵巡二以上驅逐艦三及飛行機魚雷艇多數ト交戰驅逐艦一ニ魚雷一本命中大破セシ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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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所見 (イ)敵ハ「コロンバンガラ」島ヲ背景トシ、狭視界巧ミニ接敵発射、雷撃効果ヲ確メ砲撃セルモノニシテ、早クヨリ電探ヲ使用シ、魚雷戦準備ヲナセルコト確実ナリ。電探、逆探装備ヲ要ス。優秀駆逐艦ヲ輸送作戦ニ使用セズ、優速輸送船ヲツクルコト。砲、人力旋回力ヲ強化スルコト。」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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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806二水戦日誌(2)]]p.6「(五)島風 HPBニ編入同方面作戰(「ケ」號作戰)ニ從事中ノ處AdBニ復歸(十五日以降YB)幌筵海峡發六日桂島着 九月上旬迄豫定(判読不能)内海西部ニ於テ訓練(研究發射電探射撃其ノ他)及入渠修理等ヲ實施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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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806二水戦日誌(2)]]p.10『(ホ)麾下艦船部隊ノ行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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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804十一水戦(3)]]p.36『二十一(天候略)響32dg〇六三〇出港引續キ出撃準備横須賀ニ向フ|響32dg魚雷発射/島風研究発射側方警戒敵潜掃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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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806二水戦日誌(2)]]p.56『二二日〇三二八軍務局長教育局長(宛略)軍務機密第二一一八四三番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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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806二水戦日誌(2)]]pp.64-65『二四日一九五五(長官)2F(宛略)2F電令第一二號(略) (イ)主要研究項目 電波探信儀ヲ全幅利用スル驅逐艦射撃及發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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